[특별기획] 임진왜란 전적지 답사

당항포해전과 기생 월이 이야기

이봉수 기자

작성 2020.09.16 10:11 수정 2020.09.16 17:13
사진=코스미안뉴스/당항포대첩비


1591년 가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경상도 고성땅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현재의 고성읍 수남동에서 가까운 무학리에는 기생이 있는 주막이 제법 있었던 모양이다. 그 해 늦가을 어느 날 서산에 뉘엿뉘엿 해가 저물 때 나그네 한 사람이 이곳 무학리 무기정 꼽추집에 들러 하룻밤 묵고 가기로 했던가 보다. 그런데 꼽추집에서 제일 미모가 뛰어나고 재치있는 기생 월이가 보니 한눈에 이 나그네는 일년 전 이 주막에서 몇 일 쉬다 간 사람임을 알았다. 이 나그네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요즘 말로 하면 그는 전쟁을 치기 전에 일본에서 밀파한 간첩이었다. 그의 임무는 조선의 해변을 사전 정찰하여 지도를 작성하고 침략할 수 있는 루트를 개척함과 동시에 민심과 정사를 염탐하는 것이었다. 실로 막중한 정보수집 임무를 띤 거물 간첩이었다. 그는 울산 해변으로 잠입하여 지도를 작성하면서 동래, 부산포, 다대포, 가덕 천성, 안골포(웅천), 합포(마산)를 거쳐 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과 진동면을 지나 당항만을 비롯한 고성일대를 정탐한 후 통영을 거쳐 삼천포와 사량도 일대까지 샅샅히 돌아다니며 정보수집을 했던 것이다. 그가 조선말을 잘 하는 일본 간첩이었다면 대마도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

사진=코스미안뉴스/당항포 앞바다 속싯개


그 날 이 자가 꼽추집 주막에 들어서자 기생들은 지난해에 한 번 본 사람이라 회포를 풀 생각에 마음놓고 서로 술을 권하며 퍼마시기 시작했다. 폭탄주가 몇 순배 돌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이 흘러 새벽닭이 울 즈음에 이 밀사는 고주망태가 되어 기생 월이의 품에 녹아 떨어져버렸다. 그런데 월이가 보니 이 자의 품속에서 비단으로 싼 보자기 하나가 불거져 나와 있었다. 겹겹이 싼 보자기를 살며시 풀어보니 그 속에는 장래 우리나라를 침략할 전략과 해로를 통한 공격 요충지, 육지로 도망할 수 있는 지도가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비록 내가 기녀의 몸이지만 조선은 내가 태어난 곳이고 부모의 혼이 묻혀있는 곳이 아닌가?” 생각이 여기쯤 미치자 월이는 정신을 가다듬고 밀사가 그리던 그림붓을 찾아 현재 고성만 쪽의 고성읍 수남동과 당항만 쪽의 마암면 두호리 쪽 바다를 연결하여 동해면, 거류면, 도산면과 광도면을 섬으로 만들어 놓았다. 붓을 놓자 이 거물 간첩은 몸을 뒤척이며 잠꼬대를 지껄였다. “일 년 후면 내가 이 고을의 군주가 될 것이다.” 월이는 놀라 보자기를 전과 같이 싸서 품속에 넣어주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이듬해 봄에 왜놈들이 부산으로 쳐들어와 고성 방면으로 오고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1592년 7월 13일(음력 6월 4일) 왜군의 배 32척은 첩자가 그려준 지도를 따라 지금의 고성군 회화면과 동해면 사이의 좁은 수로를 지나 고성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지금의 마동호 저수지 안쪽인 거산리와 두호리 일대의 소소포에 이르러 물길이 막힌 것을 알고는 빙빙 돌면서 북과 징을 울리기 시작했다. 놀란 동네 사람들이 산 위로 피난하여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진=코스미안뉴스/당항리


한편 당포해전에서 승리한 후 창선도에서 하룻밤을 지샌 이순신 장군은 7월 11일(이하 양력) 이른 아침부터 적이 도망간 개도(介島, 싸리섬으로 지금의 추도) 일대를 수색하면서 서서히 동진하여 저녁에 고둔포(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자고 다음날 당포(산양읍 삼덕리) 앞바다로 이동하였다. 여기서 이 지역 병사 강탁으로부터 도망간 20여 척은 거제방면으로 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 무렵 기다리던 이억기 장군이 25척의 함선을 끌고 나타나 합류하자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아군은 바로 당포를 떠나 7월 12일 밤은 지금의 통영대교 근처 일명 판데목이 있는 착포량(鑿浦梁)에서 하룻밤을 새면서 작전을 숙의했다. 여기서 거제도민 김모(金毛) 등 7-8명으로부터 당포에서 조선 수군에 쫓긴 왜선들이 견내량을 통과하여 괭이바다 서쪽 당항포(塘項浦, 고성군 회화면 배둔리 남쪽 포구)에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7월 13일 이순신 장군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장군, 경상우수사 원균 장군과 함께 연합함대 51척을 이끌고 견내량을 지나 당항포로 향하고 있었다. 이 때 진해(현재의 마산합포구 진동면) 연안에 포진하고 있던 유숭인 휘하의 함안 육군으로부터 당항포는 포구가 좁으나 전선의 출입이 가능하고 포구 안은 넓어서 해전이 가능함을 알아냈다. 곧바로 조선의 연합함대는 지금의 동진교 다리가 있는 당목 입구의 양도와 궁도 뒤에 전선 4척을 숨겨두고 거북선을 선두로 47척을 몰고 당항만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현재의 동진교는 고성군 동해면과 마산합포구 진전면을 연결하는 다리다.


일본의 거물 간첩이 그린 지도에만 의존하여 고성을 침범하려던 왜군은 이순신 장군에 의해 일망타진되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서 왜군의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 중 민간인들을 해칠 것을 우려하여 퇴로를 열어 도망치라고 남겨둔 1척을 제외하고는 모두 수장시켰다. 다음날 7월 14일 남겨둔 왜선 1척이 왜적 100여 명을 싣고 나오는 것마저도 당항만 입구의 양도 뒤에 매복해 있던 방답첨사 입부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궤멸시키고 말았다. 이 것이 저 유명한 제1차 당항포해전이다.


이 전투는 이순신 연합함대의 전공이지만 무학리 무기정 꼽추집의 기생 월이가 일본 간첩의 지도를 고쳐놓지 않았다면 고성 땅은 왜놈의 손에 아비규환이 되었을 것이다. 훌륭한 일을 한 기생 월이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이 고장에 구전으로 전해오지만 미천한 신분이라 그랬던지 그녀에 대한 정사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최근에 고성 출신 인사들이 고성향토문화선양회를 만들어 월이 설화에 대한 정론화 작업과 콘텐츠화를 추진하함과 동시에, 월이 선양 사업을 하고 있다.


이곳 당항포해전지 주변에는 아직도 임진왜란 당시의 전투상황을 추론할 수 있는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당항만 입구의 동진교 아래는 당목이라고 하는데 닭의 목처럼 생긴 좁은 물길이다. 동해면 동쪽 끝에 있는 매일봉은 속칭 망대끝이라고 부른다. 괭이바다와 견내량이 보이는 곳으로 망군들이 올라가서 망을 보던 곳이다.

고성군 동해면 장기리 서쪽 약 1km에 위치한 속칭 군징이는 군진(軍陣)이 있었던 곳이다. 동해면과 거류면 경계에 위치한 도망개는 당항포해전 당시 왜적이 도망간 길목이다. 머릿개는 마암면 두호리의 다른 이름으로 적을 추격하여 머리를 많이 벤 곳이다. 회화면 당항리 동쪽 골짜기는 속칭 핏골이라고 부르는데, 전쟁으로 골짜기가 피로 물들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당항포 잎바다를 속싯개라고 하는데, 왜군이 기생 월이에게 속아서 패했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순신전략연구소장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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